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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17 20:51
[오래 전 ‘이날’]8월16일 반 세기만의 포옹, ‘엄마품 안겨 한밤만 자봤으면···’ [기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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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2000년 8월 17일 경향신문 1면.
20년 전 오늘 경향신문 1면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실렸습니다. 1면뿐 아니라 2~6면, 9면, 17면, 18면, 19면까지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가득했던 것은 1985년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면에는 제목만 보아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연들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다룬 기사들의 제목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엄마품 안겨 한밤만 자봤으면···’

‘상봉감격 못 이겨···’ 환자 속출

‘시간이 멈췄으면···’

“정녕 가셨단 말입니까” 애끓는 사모곡

치매노모 만나 “불효자 왔습니다”

밤새 더욱 더 깊어진 ‘핏줄의 정’

이날은 15년 만에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둘째날로 남측에서 북측을 방문한 이들은 평양 고려호텔에서, 북측에서 남측을 방문한 이들은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각각 가족들과 상봉했습니다. 50여년 만에 어머니를, 아버지를, 아들을, 딸을, 형제자매를 만난 이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 가운데 일부 내용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8.15 이산상봉때 북한에 사는 딸 김옥배씨를 만나 기뻐하고 있는 홍길순할머니. 경향신문 자료사진.

- 경향신문 2000년 8월 17일 5면 ‘엄마품 안겨 한밤만 자봤으면···’

“딸을 위해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지” 16일 오전 9시 홍길순 할머니(88)는 8·15 이산가족 상봉으로 50년 만에 되찾은 큰딸 김옥배 평양음악무용대 교수(68)를 만나기 위해 워커힐호텔로 향하면서 굳은 결심을 했다. 오늘은 큰딸의 숙소에서 2시간여 속깊은 대화를 나울 수 있는 소중한 날. (중략) 그러나 애타게 그려온 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끝낸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연파랑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큰딸 김씨도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며 “한복을 입을 때 제일 이쁘다고 하셨지요. 남한에 오기 전에 일부러 지어 입었습니다”라면서 흐느껴 울었다.

분단 50년의 가슴 아픈 역사를 말해주듯 홍할머니는 딸과의 생이별에 목이 메이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자 큰딸 김씨는 홍할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머니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여기 평약음악무용대 교수증과 박사학위 수여증이 있어요”라며 학위메달을 목에 걸어드렸으나 이내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내 딸이 금의환향을 했구나. 똑똑하고 공부 잘하던 큰딸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구나. 네 아버지가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중략)

큰딸 김씨는 “어머니, 하룻밤만이라도 어머니 품에 안겨 자고 싶습니다. 밥을 지어드리고 싶습니다”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홍길순 할머니가 2000년 8월 14일 평양음악무용대 교수인 김옥배 씨의 백일 사진 등을 들고 딸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경향신문 2000년 8월 17일 4면 치매노모 만나 “불효자 왔습니다”

서울에서는 전날 노모를 만나지 못해 애를 태웠던 안인택씨(66)가 16일 앰뷸런스에 실려 상봉장소인 워커힐호텔에 도착한 어머니 모숙정씨(88)와 극적인 상봉을 이뤘다. 안씨는 전날 밤에 이뤄진 ‘앰뷸런스 모친 상봉’에서도 어머니 모씨의 병세가 중해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다음날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안씨는 노환에 치매증세까지 겹쳐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초점이 없는 눈을 보며 “불효자가 왔습니다”라며 울부짖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기사에도 나타난 것처럼 20년 전 상봉 당시에도 이미 이산가족 중 상당수는 고령이었고, 끝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이산가족 생존자들에게 남은 시간은 더욱 짧아진 상태입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13만3000여명 중 생존자는 약 38%에 불과한 5만여명에 불과합니다. 이들 중 66%가량은 80세 이상의 고령입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더 자주 이뤄지고, 상시화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현재까지 이뤄진 21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에서 가족을 만난 이들은 2만600명가량에 불과합니다. 7차례의 화상상봉을 통해 만난 이들도 3700여명뿐입니다.

20년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경향신문은 ‘상설면회소 설치 시급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상봉가족의 규모와 횟수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사설에는 “이미 남북 간에 합의한 상설 면회소를 설치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상설면회소를 통해 매일 상봉이 가능토록 하고 이곳을 통해 생사확인, 서신 및 사진교환, 재상봉 등이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상설면회소는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북 관계 경색으로 인해 그나마 이어져온 이산가족 상봉은 2018년 금강산에서 이뤄진 21차 상봉 이후 중단된 상태입니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올 추석 명절 동안 상봉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추석까지 이산가족 상봉을 실현시키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라도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마지막 한이라도 풀 수 있도록 해야하지 않을까요. 남북 양측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다시 추진하고, 정례화, 상시화하길 기대하면서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한 계관시인 오영재씨가 지었던 시 ‘다시는 헤여지지 맙시다’의 일부를 발췌해 봅니다.

이 밤이 가고/또 한밤이, 또 한밤이 가면/우리는 돌아갑니다/그러나 헤여질 때 형제들이여 울지 맙시다/다시는 살아서 못 보는/그런 영원한 리별이 아닙니다

서로가 편지하고/서로가 전화하고/서로가 자유로이 오고 갈/통일을 한시 바삐 앞당깁시다

더 늙기 저, 더 늙기 전에/우리가 어린날의 그때처럼/한지붕 밑에서 리별없이 살아봅시다/우리 다시는 헤여지지 맙시다/다시는 헤여지지 맙시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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